<능력 없는 목사>
<능력 없는 목사>
가장 선한 것은 우리 자신 혹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육체적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선물은 우리를 위해 죽음을 이기시고 정확한 타이밍에 우리를 안전하게 집으로 인도해 주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 [일상의 영적전쟁] 중, 데이비드 폴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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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반겨주시는 분은 위독한 상황의 권사님이셨다. 주변에 계신 가족들은 모두 침울하고 어두운데 어린 목사를 마주하시는 병상의 권사님은 유독 환하게 빛나고 계셨다.
2.
목사로서 싫은 일 중에 하나는 병원심방이다. 나는 그 아픔의 현실이 못내 서럽다. 연약한 우리 몸이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정말 싫지만- 병원을 간다. 그리고 거기에 주신 인생이 거하기에 목사는 당연하게 그 인생을 찾아 뵙는다. 하지만 그 아픔의 현실에서 이 어설프고 어린 사람은 힘이 없다. 무능. 적확한 말이다.
3.
유독 목소리가 큰 나는 병실에서도 소위 "쎄게" 기도하기로 유명했다. 하여 응급실 간호사나 회진도는 의사 선생님들께 엄청 꾸중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 생과 사의 현장에서, 아픔의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목청 큰 기도뿐이었다. 그거라도 해야 나는 좀 목사다워지는 듯 싶었고, 기도받으시는 분도 씩씩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속내이니 간호사, 의사 피해다니고 눈치 보는 게 일이었다. 그래도 눈치보는 것 뿐이면 괜찮다.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차도가 없고 되려 더 병세가 악화되기라도 하면... 나는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병원 커튼에 숨고 싶고 링거에서 한 방울씩 떨어져 자신을 없애는 약물처럼 그렇게 없어지고 싶었다.
4.
이런 애송이 목사의 마음을 아셨던 권사님은 일부러 더 환하게 웃어주셨다. 병실에서, 죽음을 앞둔 그곳에서 유독 얼굴이 빛나셨다. 그 빛에 나는 부끄러웠고 죄송했고 한없이 민망했으나, 그 웃음 덕분에 꼿꼿이 설 수 있었다. 마지막을 앞둔 분의 푸근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내가 선 것은.
5.
어머니가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실 앞에 앉아계실 때, 가족이라곤 나 혼자였다. 그때도 목사였으나 아픈 엄마 앞에서는 그저 작은 아이, 막내였다. 이런 막내를 향해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기도해 줘야지?"
6.
애송이가 무슨 기도의 능력이 있다고 기도를 요청하신단 말인가. 여전히 철없이 똥고집만 부리는 막내가 무슨 신령한 주의 종이라고 기도해 달라 하시는가. 나는 기도하겠다고 해놓고는 엄마의 등을 붙잡고 한없이 울었다. 울음이 기도였고 울음이 사랑이었고 울음이 소망이었다. 그저 울었다. 눈물 끝에 서로 말한 "아멘"이 최고의 기도였다.
7.
병들고 마음이 굽어지고 상처로 곪았을 때 우리는 쉽게 기도하라 다그치고 몰아세운다. 속상해서다. 내가 뭘 해 줄 수 없으니 속상하고 쓰라려서 그러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병이 낫는 것이 아니다. 물론 병이 나아야 하겠지만, 그것을 믿고 기도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서도 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결과는 주님 것이니 그저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낼 수 있도록 모든 초점을 주께 두는 것이다. 오직 이것 뿐이다.
8.
목사는 의사가 아니다. 목사는 주술가가 아니다. 목사는... 아니다. 신령하지도 않고, 신령하다한들 그저 죄인일 뿐이다. 목사나 권사나 집사나, 다 같은 죄인일 뿐이다. 죄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의로우신 내 주님만이 필요하다. 병도 나으면 좋겠고 문제도 풀리면 좋겠고 건강하면 더 좋겠지만, 병이 안 나아도, 문제가 더 꼬여도, 건강하지 않아도 주와 함께라면 그것으로 완전하다. 목사는 이 역할을 수행한다. 그 상황에서도 주를 보게 하는 것, 의사나 상황이나 실력이나 주술적 요행이 아니라, 주권자이신 주를 보게 하는 것이다. 목사만이 아니다. 주를 믿는 누구라도 이래야 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기도가 능력이 없어도 괜찮다. 능력있는 기도로 병이 낫고 구원이 임하는 게 아니다. 복음의 주인, 복음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을 낫게 하시고, 상황을 바꾸시고, 구원의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9.
영적 전쟁은 절을 7바퀴 빙빙 돈다거나 손을 내밀어 축사를 하는 게 아니다. 물론 그런 식의 "액션"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상황, 그러니까 일상의 그 순간에서 주를 보게 하는 것이 영적 전쟁의 실체다. 우리는 일상은 외면하고 뭔가 특별한 것만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점쟁이 바라보듯 목사 바라고는 이유가 이것이다. 특별할 것 같아서. 저 목사는 목소리가 힘차니 저런 기도는 하나님이 좋아하셔서 좋은 답을 주실 것 같아서.
아니다. 결코 아니다. 절대 아니다.
10.
주를 보는 것. 예수를 바라보는 것. 여기에 모든 것이 있다.
지금
주를 보라. 주님 앞이라고 인정하라. 인정하겠다고 선택하라.
그것으로 우리는 승리한다. 승리하신 주께서 약속의 말씀을 이미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주를 보라. 말씀 안에 계신 진리의 주님께 마음을 맞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