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복은 반납해야 한다
판사가 되면 법원에서 옷을 줍니다. 그게 법복이에요. 그런데 이 법복은 반드시 반납해야 합니다. 임기가 끝나면 반납하도록 법이 정해져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법복을 입었다는 것은 법의 주인이 되었다는 게 아니에요. 이건 판사의 것이 아니라 반납하는 겁니다. 누구에게? 법의 주인에게. 법의 주인은 법관이 아닙니다. 법의 주인은 국민입니다. 여러분이 법입니다.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 박주영 부장판사. 세바시 강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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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차저차해서 또 세바시에 다녀왔다. CBS와 자꾸 친해지니 여기 취직(?)을 해야 하나, 싶은 쓸데없는 생각도 해 보면서 먼 길을 다녀왔다.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2시간 걸리는 목동까지 즐거운 걸음을 했다.
2.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세계인권선언 75주년 특집이었는데, 군인원, 장애인인권, 기후에 따른 복지사각지대의 인권 등등 다양한 내용이 참 유익했다. 그중에서도 박주영 판사님의 법 인권에 대한 내용이 가장 좋았다. 아무래도 작금의 나라 꼴이 꼴인지라, 폭력적인 압수수색과 표적 수사, 그것을 조장하는 자본화 된 언론의 행태, 거기에 놀아나는 대다수 국민들의 무지와 무기력, 앞과 뒤가 다른 정부와 법무부의 냄새나는 일들에 대한 분노가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3.
박주영 판사님은 유퀴즈에도 나와서 화제가 되었던 분이다. 판사의 일상과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와 정치권력의 무자비함에 무기력하기도 했다는 말씀에, 저런 분도 계시는구나 했다. 어디에네 소장파(?)는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어쩌면 희망일 수 있겠다.
4.
법복에 관한 내용이다. 위에 썼다시피, 법복은 반납해야 한단다. 법복을 입을 때는 법을 다루고 법 적용을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의 주인이 아니라는 설명에 뜨끔했다.
5.
법관은 법복을 반납한다. 법복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여 법의 주인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목사는? 목사는 예복을 어찌 대하고 있는가? 예복을 대함에 어떤 마음이 있는가? 부끄럽고 부끄럽다.
6.
예복이 주는 힘이 있다. 교회 안에서 목사가 입은 예복은 그 자체로 차별화다. 차별은 힘이 세다. 선을 긋고 너와 나를 위 아래로 나눈다. 그래서 뭔가 허술해 보이면 목사는 일부러 가운을 두르기도 한다. 그것도 성에 안 차면 그 코스튬에 벨벳 바를 장식해서 “박사”라고 티를 낸다. 뭐.. 전통적으로 아카데믹 코스튬이 중세 성직자에 기원이 있다 하니 세 줄 장식 된 가운을 입고 강단에 서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그게 권력을, 차별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 비용도 교회에서 출자되는 일이 빈번한데, 무슨 생각일까. 알면서도 은근히 모르는 척 해야 은혜스럽다 할 것인가..?
7.
법관이 법복을 반납하면서 법의 주인이 아님을 겸손히 고백해야 한다면, 목사는 예복을 반납함으로서 내가 말씀의 주인이 아니요, 말씀의 시녀임을 고백해야 한다. 예복 입고 폼 잡지 말고 예복을 벗었을 때와 다르지 않은 마음의 가난함이 있어야 한다. 예복을 입고, 입혀주신 교회와 성도의 기도를 지긋이 밟고 서서 나 잘났다 하는 일이 많아, 여전히 부끄럽고 부끄럽다. 죄송하다.
8.
예식과 예복은 “의미”로서 거룩하다. 거룩한 것이 거룩으로 여겨지지 않고 겉치장으로 전락하면 그보다 꼴사나운 일이 없다. 정채봉 시인의 옷걸이를 애틋한 선물로 나에게, 예복을 입는 목회자에게 권하고 싶다.
9.
옷걸이 - 정채봉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하였습니다.
“너는 옷걸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 지요?”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10.
셔츠만 입었어도 예복을 입은 삶이기를 바란다. 티셔츠 입었어도 예복보다 성결한 삶이라면 좋겠다. 입어야 할 옷은 줄 새긴 까~운 이 아니다. 입어야 할 옷은 말씀이다. 입혀진 옷은 피뭍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로 입혀진 것이다.
옷이 날개다.
#우리다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