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디발의 아내
인격이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우리가 하는 행동이라고 어느 현인이 말한 바 있습니다. -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중, 빌 하이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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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 50주년이라고 떠들썩 했는데, 나는 귀닫고 살아서 그런지 모른 체로 지나갔다. 거기에 무슨 대단한 정치인들도 오셨는데, 설 시장님께서는 김정현 목사라고 성을 바꿔 호칭한 무례한 일도 있었다는 기사를 오늘에서야 봤다. 대형집회는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고, 거기에 군중-성도라 하기 어려운-으로 동원된 많은 교인들이 안쓰러워 웬만하면 거리를 둔다. 대형집회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의견으로서 무시하지는 않지만, 개인적 경험으로는 “동원”과 “채우기”로만 보일 뿐이다. 50년 전 그 전도집회와 지금의 대형집회는 겉과 속이 많이 다르다.
2.
사람은 적당히 모일 때 의미가 있다. 적당히 모여 인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모임을 우리는 공동체라 부른다. 대형집회는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가 아니면 변화는 어렵다. 공동체가 아니어도 우리 신앙에는 타인의 시선이 필요하다. 이는 적극적인 의미로서의 필요다. 너와 나를 온전케 하는 필요다.
3.
빌 하이벨스의 오래 된 수작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를 보면, 혼자 있을 때의 내가 진짜 나라는 표현이 나온다. 아무 시선도 없고, 아무 것도 거리낄 것이 없을 때 나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4.
그렇다면 나 혼자일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보디발의 아내가 다가온다.
5.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당한 유혹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요셉이 그 유혹을 이긴 방법도 알고 있다. 정확하게는 요셉은 유혹을 이기지 않았다. 유혹을 피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는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6.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는 편지에서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말했다. 여기서도 시험을 이긴다고 하지 않고 피하고, 피하는 것으로 감당한다고 했다. 어쩌면 시험은 피하는 게 상책일 지도 모른다. 죄의 나는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7.
바로 이럴 때, 피할 때 타인의 시선이 필요하다. 타인의 시선 앞으로 가서 시선을 체감해야 한다. 그 시선이 나를 지켜준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시선을 자주 잊는다면, 잃는다면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의도적으로 나를 노출시킬 필요가 있다. 이때 공동체가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 물론 공동체가 아니더라도 타인에게 노출된 상태만으로도 우리는 유혹을 피하고, 피하는 것으로 시험을 감당하고 이길 수 있다.
8.
보디발의 아내는 여러 모습이다. 음란만이 아니다. 중독이 되는 모든 것들의 얼굴이며, 내가 은밀하게 즐기는 쾌락일 수 있다. 지독한 게으름일 수 있고, 게임일 수 있고, 드라마일 수도 있다. 남들 앞에서 하지 못할 것이라면 나 혼자일 때도 하지 않는 게 낫다. 혼자일 때의 습관이 어렵다면 가까운 카페라도 가야 한다. 그게 범죄보다 낫다.
9.
내심 염려하는 것은 오늘날 초개인화 된 우리 시대가 점점 더 남의 시선에 무뎌간다는 점이다. 나에게 간섭 마라, 하는 일들이 매너처럼 여겨져서 십대가 담배를 꼬나물고 있어도 쉽게 말리지 못하는 세상이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에게 훈육도 못하게 하고 있으니 말 다했다. 자발적으로, 개인적인 면으로만 ‘시험을 이겨내라’ 하는 것은 소극적이다. 성경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공동체 안에서 네가 죄로 빠지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무관심으로 인한 책임이며 적당히 선 긋고 멀리 한 책임이다.
10.
내게 다가오는 보디발의 아내는 무엇일까? 죄를 피해 달아나야 할 나의 도피성은 어디인가? 나의 도피성, 주님 허락하신(?) 스벅과 이디야에 가야 한다. 할 수 있다면 공동체와 만나야 한다. 유비쿼터스 시대에 우리는 너무 단절됐다. 너무 혼자여서 외롭고 약하다. 군중 속에 고독이라 했다. 그러니 우리 스벅에서 만나자. 역마다 스벅이 있고 골목마다 스벅이 있으니, 스벅 주변에는 반드시 이디야가 있으니, 우리는 만나야 산다.
#우리다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