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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의 한계>

우리다시 2023. 5. 29. 18:03

 

"도파민이 노력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완화해 주는데 엄청나게 강력한 물질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더 오래 노력할 수 있게 해주고, 궁극적으로는 노력 과정 자체를 즐기게까지 해 주지요. 노력 후에 받을 보상이 아니라 노력 자체로 보상인 겁니다. 노력 후에 보상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우리 뇌는 보상에 따라 더 노력하지 않게 됩니다."

- 엔드류 후버만 /스탠포드 신경생물학 교수

 

엔드류 후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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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자신은 스스로 희망고문에 빠질 때가 있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이걸 하고 나면 뭐가 될 거야." 이런 논리는 실생활에서 이렇게 작동한다. "학원을 다니면 나는 성적을 더 올릴 수 있을거야." "코를 조금만 오똑하게 하면 나는 더 인기가 많아질 거야." "그 대학에 들어가면 성공하게 될 거야." 등등

 

2.

이런 기대가 희망고문인 이유는 단순하다. 기대한 결과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희망고문을 작동시키고 스스로 그 속을 헤맬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만 뒤쳐지는 것 같고, 나만 실패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3.

엔드류 휴버먼은 이에 대해서 보상의 초점을 바꾸라고 말한다. 노력한 후에 받을 보상이 아니라, 노력 자체가 보상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뇌가 보상에 초점을 맞춰서 학습되기에, 노력 후에 기대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때는 더 노력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뇌.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인생이 되고 만다.

 

4.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나아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많이 들은 얘기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데도, 엔드류 휴버맨의 주장이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도파민"을 근거로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 몸 내부에 존재하는 신경전달물질의 성격을 분석하고 활용하여 설명하기에, 좀 더 이해가 쉽다. 정보와 데이터가 주는 신뢰는 상당하다.

 

5.

최종 보상에 초점을 맞추면 결국엔 실패한다. 율법의 실패요, 보상의 실패다. 노력의 과정 자체가 궁극적인 보상이라는 것을 뇌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노력하는 과정을 보상이라고 확신하게 되면 결과에 따라 노력이 달라지지 않는다. 노력하는 그 자체로 기쁠 것이므로.

 

6.

이는 대단히 성경적인 이해다. 우리 신앙은 죽어서 가는 극락만을 보상이라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의 개념이기에, 지금 여기서 살아내는 믿음의 여정, 치열한 날들 자체가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 나라다. 특별할 것 없이 평범-어떤 때는 평범 이하이기도-한 날들을 살면서도 우리가 기뻐하고 웃을 수 있는 것은, 세속에 휩쓸리지 않는 이 고됨 자체가 믿음의 증명이요,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저 멀리 하늘 어디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점수를 매기며 나를 향해 더하기 빼기 산수를 하는 분이 아니다. 이 고됨에 함께 하시는 분이다. 이 믿음이 하루를 견디게 하고 이런 믿음만이 치열함에 무너지지 않게 한다.

 

7.

비가 와서였는지, 공동체가 부실해서였는지, 목사가 미흡해서였는지 예배가 조촐하다 못해 처절했다. 아이들은 속절없이 떠들고 부산하다. 오디오에 개념 없는 잡음이 섞인다. 자리는 텅텅 비었고, 목소리는 빈 공간을 때린다. 이렇게 해서 교회가 될까? 때려치워야 할까?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순간순간마다 고비다.

이럴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이런 것이 아니다. "이 고생 끝에 큰 교회가 될 거야." "나도 인정받는 목사가 될 거야." 등등, 고생스러움 끝에 뭔가 대단한 보상이 있을 것처럼 여기는 마음은 애시당초 주워 담지 말아야 한다.

 

8.

이럴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이런 것이다. 아무도 없어도 지금 나의 예배가 가장 값지다. 나를 드리는 지금이 가장 진실하다. 지금이 임마누엘이다. 지금 여기, 이런 날에도 주님은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신다. 지금이 사랑이다.

 

9.

마포로 가는 걸음과 마포에서 돌아오는 걸음은 똑같지 않다. 나는 나의 이 다름이 못내 짜증스럽다. 눈에 보이는 결과여야 만족스럽다 여기는 속물근성에 질린다. 끈질긴 인정욕구에 신물이 난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것은 온전한 예배다. 한 명도 없을지라도 온전해야 한다. 하여 이 과정 자체가 의미여야 한다. 나는 없고 주님만, 내게 오직 주님만 남아야 한다. 그러려면 오히려 한 명도 없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10.

도파민. 뭐 이런 거는 잘 모르겠다. 내가 고백해야 할 것은 감사다. 오늘도 예배할 수 있어 감사하다. 내일도 평범한 날의 연속이다. 이 평범이 비범이 되지 않을 것이다. 비범도 내게로 와 평범으로 자리할 것이다. 평범하게 그저 주님 앞에서 살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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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저녁은 치킨이다.

비고 빈 육신에 콜라를 들이붓는다.

이는 보상이 아니다, 치열한 과정이다.

이렇게 뇌를 속인다. 치콜은 반복될 것이므로.

주님, 적셔주십시오. 아멘.

 

#우리다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