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를 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밥, 너는 주유소를 찾듯이 내게 오는구나."
나는 주유소를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주유를 좋아하진 않지만, 운전은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운전을 하려면, 반드시 주유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나는 이렇게 받았다.
"밥, 너는 네 필요를 채우려고 기도의 자리에 나오는구나. 내가 네 마음의 첫사랑이기 때문에 오는 게 아니구나. 재충전해서 그 힘으로 네 인생의 첫사랑을 좇으려고 내게 나오는구나."
내 첫사랑은 사역이었다. 나는 운전이 너무 좋았다! 영혼이 구원받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시 전체를 취해 주님께 드리고 싶었으며,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나는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시87:7)라는 말씀처럼 내 모든 근원이 주님께 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나를 지탱하는 주된 힘은 사역의 성취에서 오는 '짜릿함'이었다. 나는 주님이 알려 주신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주님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하시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신다. 내 경우에는 사역을 거둬 가셨다.
아, 정말 아팠다!
- <내 영이 마르지 않는 연습>, 밥 소르기 저.
1.
너의 열심은 "자기 의"야.
그 형은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찌르듯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이 말에 나는 깊이 찔렸다. 내가 선택한 반응은 논쟁이었다. "그래서 형은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렇게 나태하고 게으른 거예요?" 이 날의 갈등 이후 그도 나도 서로를 보지 않는다. 말이 맞던 틀리던 간에 서로가 서로를 비난했기에 당연한 결론이다.
2.
서로 보지 않은 지 무려 10년도 넘었는데, 당시의 그 말은 여전히 나에게 남아있다. 나의 어떤 면에는 그 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의 욕구 중 하나는 "인정"이다. 어려서부터 동네 신동이라 불리던 형에게 항상 비교당했기에, 어쩌면 당연한 욕구이기도 하다. 잔머리를 비상하게 굴려 온 동네 사건사고는 다 휩쓸고 다닐 때마다 부모님은 "형 반만 따라가라"고 다그쳤고, 그럴수록 나는 더 기발한 사건을 벌이고 다녔다. 돌아보면 인정받고 싶어 사고치는 전형적인 또라이 유형이다.
3.
군대 다녀온 후, 다행스럽게도 인정받음의 욕구는 열심으로 자리잡았다. 성실은 배반하지 않는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인생의 동력으로 삼았다. 노력은 그랬다. 썩 괜찮은 결과를 주었다. 하지만 노력은 그만큼 나를 갉아먹었다. 열심을 낼수록 지쳤다. 뭔가 하나 끝나고 "잘했다, 대단하다, 수고했다"는 말을 듣고 나면 되려 허무했다.
4.
밥 소르기의 <내 영이 마르지 않는 연습>에는 이와 비슷한 저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사명이 있었다. 주님의 일이라는 그 사명이 그의 원동력이었다. 그랬던 밥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너는 주유소를 찾듯이 내게 오는구나."
이 말에 신앙의 전부가 걸려있다.
5.
섬김과 헌신을 즐기는 건 죄가 아니다. 그건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빠져버리면 주객전도가 일어난다. 즐거움에 취해 하나님을 이용하게 된다. 이는 죄다. 확실히 이건 죄로 결실한다. 심지어 중독으로까지 변질된다. 하나님은 결국 그 즐거움을 가져가신다. 가져가시는 방법은 다양하다. 일이 안 풀리거나, 이전과 같은 만족이 없거나, 해서 공허가 찾아온다.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말처럼, 이를 갈아도 만족이 없는 헛된 열심에 메말라 간다.
6.
목회자로서 나는 성실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성실은 복음과 구원의 결과 중 하나, 구원하심의 분명한 증명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사랑을 경험한 이는 불성실할 수 없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까지 했다. 달려갈 사명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했다. 바울만 그랬을까? 예수를 경험한 이는 불성실할 수가 없다. 그건 거듭남이 아니다.
7.
하지만 열심이 있다고 구원의 증명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열심은 결과 중 중요한 특성 하나일 수는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수없이 경험했고 목격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치사한 싸움과 알력, 갈등. 서로에게 욕지기를 내뱉으며 정죄하는 이들은 모두 구원받았다고 고백한 이들이었고, 모두 열심을 내는 헌신자들이었다. 헌신을 하지 않는 이 또는 열심이 없는 이들은 오히려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관심조차 없다. 싸우는 이들은 열심을 내는 이들이다. 하여 열심 하나를 보고 믿음이 좋네, 크네 하는 말은 쉽게 하지 말아야 한다.
8.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9.
주님은 함께 하시면서 가장 알맞은 것을 주신다. 내가 열심을 내는 건 둘째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하는 게 중요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열심히 해 놓고 주님을 놓치고, 열심 때문에 너를 놓이면 도대체 그 열심은 무슨 가치가 있을까. 공부도, 학위도, 교회성장도, 건물도, 선교도 다 같은 맥락이다. 결혼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놓치고 하나님께 필요만 구하려 할 때, 그렇게 우선순위가 달라지고 죄가 되어 버릴 때, 주님은 그것을 옮기신다. 그것이 없어지더라도 차라리 주와 함께 하는 것이 더 낫기에.
그런데 이건 아프다. 많이 아프다. 아픈 그 자리가 바로 내 십자가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바로 그 지점이다. 거기에서부터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좁은 길이다.
10.
나는 열심히 한다. 뭐든. 내게 주신 것이라면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하니까. 하지만 열심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부단히 애쓴다. 마르다의 오류는 이것이다. 열심에 잡아먹혀버린 자기 의. 그녀에게는 그 주방이 예수님 앞과 같아야 했다. 그 요리가 주와 함께 하는 기쁨이어야 했다. 마리아나 마르다나 같은 마음이어야 했다.
#우리다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