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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가?>

우리의 복음은 억눌린 자와 소외된 자, 마음이 상한 자, 불행한 자에게만 알맞게 맞춰진 것 같다. 우리는 슬픈 자를 위로하고 눌린 자를 북돋우는 적절한 임무를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있는 강한 자, 성숙한 자, 기뻐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 저자 윌리엄 윌리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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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등학생인 그 녀석은 목사인 나보다 이미 세상을 잘 알았다. 돈이면 된다는 확신이 있었고, 돈없는 목사는 보잘것없이 큰소리만 치는 허세로 보였을 것이다. 그 녀석은 지독하게도 예배와 복음을 거부했다. 일단 부족한 게 없었다. 아버지는 잘나가는 정치인 근처에서 실속을 누렸고 꽤나 힘을 쓸 수 있었으며, 넉넉을 넘어 차고 넘치는 용돈을 받았다. 어디든 좋은 승용차가 데려다 주고 데리고 왔다. 부족한 게 없었다. 부족함은 가난한 목사인 나에게 있는 문제였을 뿐이다.

2.
다른 누구가 아니라, 당장 우리 애들이 복음을 몰랐다. 이 아이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트에 가서 뭔가를 들고 나와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내밀면 돈을 내지 않아도 통과할 수 있는 아빠의 모습을 본 후, 아들은 말했다. "우리 아빠는 돈보다 더 좋은 걸 가지고 있어서 아무 거나 다 살 수 있어요." 이런 아이에게 복음을 설명하기란 참 어려웠다.

3.
호치민에서는 더 막막했다. 일단 교회로 오는 이들은 자발적이다. 전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교회로 왔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열려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복음에 더 절실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해외라는 불안한 현실에서 가족의 안전과 마음의 안정을 위해 종교활동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하여 헌신은 메말랐고, 희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꽤나 좋은 분들이 많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뭐 하나 하려면 마음 허덕이게 하는 일들은 더 많았다. 마음에 안 든다며 교회를 옮기는 일은 또 얼마나였는지. 나의 부족함이 있었을 테다. 다른 원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이 확실했다면 그러지는 못했을 것이다. 후진국인 동남아에서 주재원으로 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상류층 생활이다. 한국에서는 누려보지 못했던 호사를 누린다. 손에 물 뭍히지 않아도 된다. 집안일은 내킬 때만 해도 된다. 밥하는 게 아니라 쿠킹클래스 같은 취미만 해도 된다. 이런 삶에 복음을 어떻게 말해야 하고 전해야 할까? 벽을 대하는 것처럼 막막했다.

 

 

4.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가>의 저자 윌리엄 윌리몬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오랫동안 나는 이 사람들에게, 교회 없이는 정말로 잘 지낼 수 없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정말 행복한 것도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라고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생각을 고쳐먹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정말 행복하고 만족스러울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설교와 신학은 그들을 완전히 배제했는지 모른다. 참으로 복음을 듣기 위해 우리는 슬프고, 우울하고, 죄와 부패에 빠지고, 미숙하고, 아이처럼 의존적이어야만 하는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5.
저자는 "그들은 특별한 종류의 복음적 메시지가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 역시 죄인이지만, 약한 사람들의 죄와는 다르기에,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반응, 신앙이 필연적으로 결실하는 높은 수준의 윤리와 예수의 삶을 살아가는 성장과 성숙이 요구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6.
하지만 이들에 대한 통상적인 접근방식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자신이 행복하고, 풍족하고, 쓸모 있고, 성숙하다고 생각하지만요. 하지만 당신은 불행합니다. 당신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당신의 문제는 자기기만과 오만으로 가득해서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당신의 문제입니다."

너무 익숙한 말들이다. 교회는 의도적으로 죄책감을 씌우고 심어주려 한다.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복음을 죄책감으로만 접근하려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이것에 가장 능숙한 이들은 신천지다. (비록 저자가 통일교를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고 있더라도)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당신에겐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복음을 내미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이와 같은 종교적 행태를 저자는 "설교의 지배-구출 스타일"이라고 정의한다.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 문제로 인한 공포를 조성한다. 지옥이나 심판, 죄책감 등이다. 이후 문제에 대한 답을 내(교회)가 가지고 있다며 주도권을 잡은 뒤, 모든 상황을 권위자로서 지배하려 든다. 주님의 방식, 성경이 보여주는 방식은 이와 다르다.

7.
문제보다 은혜가 앞선다. 탕자는 자신의 문제(죄)를 깨달아 아버지께 돌아온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성품을 뒤늦게 인식한 후 자신의 삶을 바꾼다. 아버지가 먼저 있었다. 회개는 선행한 은혜에 뒤따라 오는 것이지, 회개가 우선되지 않는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다. 바울은 남부럽지 않은 삶이었다. 그랬던 그가 선행하신 은혜의 주님을 깨닫자, 그는 회심한다. 은혜가 우선이고 은혜에 비추어 본 내 삶에 대한 자각과 반성, 회심이 뒤따른다. 하지만 교회는 순서가 뒤틀렸다. 죄책감을 먼저 설정한다. 이는 교권주의의 강화는 될지언정, 복음에 이르지는 못한다. 종교권위와 종교노예만 남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목사는 안타깝다. 스스로 권위자가 되려 하나 결국엔 스스로도 권력과 돈의 노예가 될 뿐이다. 노예로서 노예를 양산하니, 주인에게 합당하다 할 수 있을까.

8.
종교권위주의에 익숙해진 교회는 필연적으로 미성숙한 신앙 양태를 만든다. 진리는 자유케 하나 교인들은 권위에 묶여 줄곧 애 같은 상태에 머문다. 이래야 목사는 "친절한 부모같은"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이는 구조적인 죄다. 문제는 이 권위적 구조(율법주의) 안에서 "머물고 있는" 신자의 상태다. 애 같은 상태. 아이 같은 순전한 믿음, 순수한 순종, 기쁨의 찬미 같은 것이 아니라, 유치하고 이기적이며 교활한 미성숙을 말하는데, 오늘날 종교권위에 몰입한 교회는 이런 미성숙한 교인을 양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이 저자가 짚어내는 핵심이다. 성장판이 막힌 그리스도인.

9.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본 회퍼의 글을 인용하면서 풀어간다. 죄책감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그치라. 반대로 그들이 가진 강함(건강, 재력, 학력, 지식과 지혜 등등)을 성경적으로 이해/사용하고 헌신하는 데 중점을 두라. 그들의 힘은 장애가 아리나 기회다. 더 나은 삶, 대승적 비전-이라고 나는 해석했는데-을 제시하라. 곧 십자가를 살아내고 드러내는데 옳게 사용되도록 인도하라. 강함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 성도의 목적은 그리스도 밖에 없으며 그에게까지 자라나는 것임을 가르치라.

10.
개정판 서문에서부터 당차고 빳뻣한 직설화법이 성큼 다가온다. 도전적인 어투가 제목만큼이나 자극적이다. 짜릿하다. 교회에서는 듣기 힘든 "웨슬리"의 이름이, 감리교회의 정체성이 툭툭 튀어나와 즐겁다. 무엇보다 웰빙 보수주의가 되어버린 현대 교회의 실상과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자기만을 위해 복을 외치는 교인의 실상이, 왜/무엇이 원인인지를 성경적으로 짚어낸 탁월함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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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말했다. "태헌아 공부해서 남 주자."
아들이 말했다. "아빠 공부가 싫으면 어떡해야 해요?"
갈 길이 멀다.

#우리다시교회 #reStart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