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가는 변하지 않는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세상의 모든 억울한 죽음이 자기 탓인 양 자책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몸과 목소리를 빌려준다. 그의 문학은 증언에 헌신하고 해원에 앞장선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중, “고통받은 마음의 역사”에서. 신형철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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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계표를 보니 그 해에는 59회 장례를 집례했다. 1년이 52주라 하니 한 주마다 장례식을 한 셈이다. 그 전 해는 더 했다. 67회 장례를 치렀다. 주마다 장례가 아니라, 한 주간에 두어 번 겹치기도 했고, 세 번인 적도 있었다. 교구 행사와 겹치기도 해서 동서남북 전국을 하루에 찍고 다니다가 허리가 망가졌었다. 아픔에 일어나지 못했던 그 토요일을 기억한다. 감히 깜도 안 되는 이가 함부로 장례를 인도하며 죽음의 주변을 서성이다 몸이 탈 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2.
죽음 앞에서는 죄다 억울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옛사람의 말처럼, 검은 넥타이를 조이고 간 곳마다 억울했다. 호상이라는 말이 있다지만 현장에서 사용될 말이 아니었다. 죽음은 죽음 자체로 아팠고, 남은 이들은 슬픔을 겨우겨우 짊어지고 있었다.
3.
목사인 나는 그 앞에서 종종 할 말을 잃었다. 철저하게 매뉴얼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꿰고 있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천국 소망이 있는데 왜 우느냐고, 믿음이 있으니 힘내라는 윽박지름이 목사의 대단한 믿음의 경지인 것처럼,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믿음이 없어서. 나사로야 일어나라! 하신 예수는 내 앞에 없었다. 항상 이랬으니 장례가 제대로 되었을까. 집례랍시고 폼잡고 돌아오던 길에서는 항상 씁쓸했다. 무거웠다.
4.
먼 나라 조문으로 온 동네가 떠들썩하다. 망신살이 글로벌한 걸 보니, 조만간 무슨 일이라도 날 듯 싶다. 때마침 천공이라는 도인 같은 분의 조문에 대한 강설 영상이 며칠 전에 올라왔다고, 더 법석이다. 물론 주요 언론/방송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궁금했다. 조문 가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무슨 말을 못 하고 담아두었을까. 그런 것이나 있긴 했을까. 잘 모르겠다.
5.
신형철 작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임철우 작가에 대한 단상을 읽는다. 글에서 저자는 임철우 작가의 자전적 단편소설 <낙서, 길에 대하여>를 읽고는, 이렇게 소회한다. “이 소설은 지금껏 내가 읽은 것 중 가장 고통스러운 자기 고백의 하나다. 한때는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저 소설 이야기를 자주 했다. 언젠가는 당황스럽게도 저 소설의 참혹한 고통이 내게로 건너오면서 목이 떨리고 눈물이 고여와 잠시 강의를 멈추어야 했다. 이듬해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 눈물이 가소로워서 나는 이제 저 소설 얘기를 잘 하지 못한다.”
6.
앞선 작가의 마음이 또 다른 뒷선 작가의 마음에 건너와, 마음과 마음을 이었나 보다. 이어지다가 같아졌나 보다. 이심전심이라고, 알아진 마음에 마음이 떨려 울컥, 중년의 무거운 눈물을 자아냈나 보다. 그런데도 마음을 이어받은 자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내 눈물이 가소로워서”. 그가 읽어 마음에 담아낸 임철우 작가의 글은, 그가 썼듯,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한 아픈 책임의식이다. 하여 임철우 작가는 글과 삶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하지만 정작 그의 글을 읽은 나(자신)는 그러질 못하고 있으니, 눈물이 나는 것이 우습다, 는 뜻일 테다.
7.
장례식에서 만난, 그런 데서(?) 만나지 않았으면 싶었던 그 권사님은 까만 넥타이로 목을 조이고 들어선 앳된 내 손을 붙잡고 울며 말씀했다. “목사님, 어떡해요.” 대답해 줄 수 없는 권사님의 탄식에 눈물이 나면서도 스스로가 한심했다. 많은 말들이 있지만 하나도 꺼낼 수가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것뿐이다. 이거라도 들어주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8.
다시 교회가 된다면, 나는 아픔을 붙잡고 싶다. 너의 아픔에 내가 제대로 답도 못 주겠지만, 손이나 붙잡아 줄뿐이겠지만, 그래도 서로의 아픔을 들어주는 우리이고 싶다. 적당한 립서비스로 천국을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네 옆에 있다고, 할 말도 없지만 그래도 옆에 있다고 하고 싶다. 어쩌다 한숨이라도 쉬면 놓치지 않고 등을 토닥여 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교회여서 우리라고 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항상 이 마음으로 너를 조문하고 싶다.
9.
그래야 우리는 교회가 될 터이다. 작은 아픔을 작게나마 위로하고, 함께 일어나 너의 길을 가도록 등을 토닥여주며, 그러면서도 힘차게 밀어주는 교회이고 싶다. 그 작은 아픔에 넘어질 네가 아니라고, 너에게 그리고 나에게 주신 생명의 부르심은 멈추지 않는 거라고, 그것으로 너와 내가 이 길에 함께 있는 거여서, 너를 밀어준다고. 등 떠밀듯 밀지만 그게 사랑이요 교회의 가치라고 말하고 싶다. 아픔을 위로하러 가서 아픔을 넘어서는 사랑으로 곁을 지키고 싶다.
10.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지나쳤는가. 왜 나는 놓치고 후회하는가. 다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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