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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착한 리더가 온다

BOOK 어디서 위로를 얻을까

한마디로 행복한 사람들은 가족이나 지인들의 관계에서 위로를 받았고, 행복감이 낮은 사람들은 돈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금전적 이득을 통해 스트레스를 줄이고자 하는 것은 마치 술로 상처입은 속을 다시 독한 술로 달래는 것과 같습니다.
-[착한 리더가 온다], 김태윤 저. 체인지업



1.
사랑은 계좌로 말하는 거야.
예전에 체인지그라운와 로크미디어의 출발이 된 유튜브 신박사TV에서 신영준 씨가 했던 말이다. 10년도 더 된, 오래된 일인데 이 말이 꽤나 반향이 컸다. 적당한 말로 위로랍시고 하는 잔소리보다 몇 만원이라도 실제적인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게 말의 요지였다.

2.
말의 맥락을 이해한다면 충분히 동의한다. 그러나 왜 이 말이 나왔는지 맥락이 없이 문장을 받아들인다면 문제가 된다. 사랑과 돈을 등식으로 풀어내면 사랑은 아프다. 돈 없는 부모, 돈 없는 자식, 가난의 대물림에 구조적으로 묶인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돈으로 모든 것을 퉁치려고 하는 배금주의는 더 심각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가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지면 폭력도 배상으로 정당해진다. 일명 ‘매값’이 생기고, 불의도 적당한 돈으로 정당해진다. 이런 사회는 희망이 없다.

3.
교회에서도 비슷한 등식이 설파(?)된 적이 있다. 누가 교회를 더 사랑하는지 헌금한 것을 따져보자, 했던 일이 있었다. 이것이 특정한 대형교회만의 특이한 관점이 아니라, 거의 모든 교회의 보편적 인식이었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었다.

4.
순서를 바르게 해야 한다. 사랑하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어서 금전적 섬김을 할 수 있다. 내게 주신 봉투는 봉투 안의 금액보다 훨씬 더 크기에, 이것을 아는 서로는 서로의 마음 씀씀이에 위로를 받는다. 이런 관계는 복되다. 현실적으로 더 “해석”을 확장해 본다면, 금전의 표현 이전에 이미 많은 기도와 대화,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 사랑의 표현 중 하나로서 물질은 큰 의미가 된다.

이것이 거꾸로, 역리가 되어버리면 곤란하다. 이러면 봉투로 사람을 따져야 하고 금액으로 사랑을 가늠해 버리고 만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계산이다. 계산이 앞어 우리 시대는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 갖는다. 계산이 앞서 열등감에 시달리고, 계산에 눌려 평생 빚 속에서 허덕인다. 삭막함은 다름이 아니다. 숫자에 시달리는 현실이다. 귀신의 일은 밤새 대바구니의 구멍을 세는 것이어서, 우리 조상들은 마루에 바구니를 걸어놓고 액땜을 했다지 않은가.


5.
[착한 리더가 온다]의 저자 김태윤 씨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다음에 다시 ‘수신’이 와야 한다고 말한다. 시대가 빠르게 바뀌고 문화와 가치가 수시로 전복되기에, 이전의 수신으로는 지금의 시대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다. 올바른 리더는 시대에 맞게 수신하여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고, 이웃과 동료에게 바른/착한 영향력을 주는 것이라 설명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건강한 행복감을 누려야 하는데, 건강한 행복감이란 관계에서 얻는 위로이지, 물질적 보상이 아니다. 물질적 보상에 목적을 두는 이는 덜 행복하다. 해서 더 물질에 매달린다. 행복이 돈이라는 등식을 세우면 이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세상에는 가진 게 많아, 더 아픈 삶을 사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SNS에서 보이는 그들의 행복은 화려해 보이나 행복이지 않을 수 있다.

6.
이런 시대 문화 안에서 교회는 공동체를 통해 참된 위로를 나누어야 한다. 이 관계가 진짜 신앙이며 올바른 교회라고 당당히 말해야 한다. 공동체의 관심 안에서 기도가 어우러지고 위로와 바른 격려, 가르침이 어우러질 때, 필요에 따라 물질의 섬김, 일명 플로잉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럴 때 물질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세워진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처럼 서로 섬기고 서로를 채워줌으로서 “가난한 자가 없었다”는 현실이 우리의 것이 된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가난이 꼭 돈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제한하고 싶지 않다. 가난한 자들이 없었다는 말은 그들이 넉넉했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소한의 필요를 해결하는 수준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감사했다. 사랑 안에서 위로함으로 서로의 마음이 풍성했기 때문이다.

7.
교회의 대안은 이것이다. 느슨한 유대일 수 있으나, 진심의 관심이어야 한다. 그 진심이 기도의 손으로 나타나야 한다. 서로 기도하는 사랑이어야 한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기도는 연결될 수 있다. 목회자의 역할은 이 연결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교회를 아무리 다녀도 이런 관심과 위로가 없다면 헛것이다. 기도의 관계를 어어내지 못하는 교회는 건강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에 와 기도하라”는 말은 얼마나 소극적이며 제한적인가.

8.
진짜 위로는 너의 진심이다. 사람이 가장 좋은 환경이 되는 때는 진심이 통할 때다. 적당한 립서비스가 되어버린 “기도할게요”는 답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 미루고 잊어버린 기도는 얼마나 많은가.

9.
우리 서로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 소망의 출발은 내가 진심으로 너를 위해 기도할 때다. 이 소망의 완성은 서로의 진심이 기도로 확인될 때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너를 경험하는 일은 정말 복되다. 속장은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고, 목사는 이런 마음이어야 한다고 나는 배웠다. 가르쳐 주신 그분들이 나를 위해 울어주셨다. 지금도 울며 진심으로 기도하신다. 해서 나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이런 삶이 행복하다. 나는 감사하고 행복하다. 가진 게 없으나 모든 것을 가졌다. 사랑을 가졌다.

10.
진심의 사람이 그립고 진심의 교회가 그립다. 누군가도 이걸 그리워할 거 같아 우리는 오늘도 진심이 되고자 한다. 조건없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시대를 산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평생이라고 진단하는 시대를 산다. 행복은 어디 있는가? 돈에 있지 않다. 돈이라고 말하는 세상에 대해 성도는 “우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러면 지금 내가 행동해야 한다. 진심의 위로를. 가정에서부터. 곁의 동료에게부터.

#우리다시교회 #착한리더가온다